물리적 우주에서 우리는 신성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지적 세계에서 우리는 영원한 진리를 식별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선함은 오직 개인적 종교 체험의 영적 세계에서만 발견된다. 그것의 참된 본질에 있어서, 종교는 하느님의 선함에 대한 신앙-신뢰이다. 철학적으로 볼 때, 하느님은 위대하고 절대적이며 심지어는 지능적이고 개인적 일 수 있지만, 종교적으로 볼 때 하느님은 또한 도덕적임에 틀림없다; 그는 선하심에 틀림없다. 사람은 위대한 하느님은 두려워했겠지만, 그러나 사람은 오직 선하신 하느님만을 신뢰하고 사랑한다. 하느님의 이 선함은 하느님의 개인성의 일부분이며, 그것에 대한 그 충만한 계시는 오직 하느님의 믿는 아들들의 개인적 종교 체험에서만 나타난다.
종교는 영 본성의 초(超)세계가 인간 세계의 근본적 필요를 인식하고 거기에 응답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화종교는 윤리적으로 될 수 있지만, 오직 계시 종교만이 참되게 그리고 영적으로 도덕적이 된다. 하느님이 임금으로서의 도덕으로 지배하는 신(神)이라는 옛 개념은 예수에 의해 부모-자녀 관계의 친밀한 가족으로서의 도덕인, 자애로운 손길이 미치는 차원으로 향상되었는데, 필사자의 체험에서 이것보다 더 온화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
“하느님의 선함의 풍부함이 잘못을 범한 사람을 뉘우침으로 인도한다. “ “모든 선한 재능과 모든 완전한 재능은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온다.” “하느님은 선하시며; 그는 사람들의 혼이 쉴 영원한 피난처이다.” “주님 하느님은 자비롭고 인자하시다. 그는 오래-참으시고 선(善)과 진리가 풍부하시다.” “주님의 선함을 맛보고 알라! 그를 신뢰하는 자는 복이 있다.” “주님은 인자하시고 연민이 가득하시다. 그는 구원의 하느님이시다.” “그는 절망에 빠진 자를 고치시고 혼의 상처를 싸매신다. 그는 사람의 만능이신 은인이시다.”
왕-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개념은, 그것이 비록 높은 도덕기준을 육성하고 그리고 법을-존중하는 사람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만들었지만, 개별 신자를 시간과 영원 안에서의 그의 지위에 있어서 불안이라는 슬픈 처지에 내버려 두었다. 후기의 히브리 선지자들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임을 선언하였다; 예수는 하느님을 각 인간 존재의 아버지로 드러냈다. 예수의 일생은 하느님에 대한 필사자 개념 전체를 초월하여 조명하고 있다. 자아없음은 부모의 사랑 속에 선천적으로 있다. 하느님은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사랑하신다. 그는 모든 우주 개인성의 파라다이스 아버지시다.
정의(正義)는 하느님이 우주의 도덕 법칙의 근원임을 의미한다. 진리는 하느님을 계시자로, 가르치는 자로 보여준다. 그러나 사랑은 애정을 주고 갈망하며, 부모와 자녀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이, 납득하는 동료관계를 추구한다. 정의(正義)는 신성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사랑은 아버지의 태도이다. 하느님의 정의(正義)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아없는 사랑과 모순된다는 잘못된 추측은, 신(神)의 본성에 합일성이 없을 것이라고 가정했고 그리고는 하느님의 합일성과 자유-의지성 둘 모두에 대한 철학적 공격인, 보상 교리라는 고심작으로 직접 가도록 이끌었다.
그의 영이 땅에 있는 그의 자녀들 속에 거주하는, 하늘에 계신 자애로운 아버지는, 분리된 개인성─공의의 개인성 그리고 자비의 개인성─이 아니며 뿐만 아니라 그것은 아버지의 은혜 또는 용서를 구하기 위하여 중재자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신성한 정의(正義)는 엄격한 인과응보의 공의(公義)로 지배되지 않는다;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은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을 초월한다.
하느님은 결코 분노하거나 복수하시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지혜가 종종 그의 사랑을 억제하며 한편, 공의(公義)가 그의 거부된 자비의 조건을 정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의 정의(正義)의 사랑이 죄를 동등하게 미워하는 것으로 전시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버지는 일관성 없는 개인성이 아니며; 신성한 합일성은 완전하다.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안에는, 하느님과 조화-협동자들의 영원한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합일성이 있다.
하느님은 죄인은 사랑하지만 죄는 미워하신다: 그러한 말은 철학적으로는 참말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초월적 개인성이며, 개인만이 다른 개인들을 사랑하고 미워할 수 있다. 죄는 하나의 개인이 아니다. 하느님은 죄인이 개인성 실체(잠재적으로 영원한)이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반면, 죄에 대해서는 하느님이 어떤 개인적 태도도 취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죄는 영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오직 하느님의 공의는 단지 그것의 실존에 대해 인식할 뿐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죄인을 구원한다; 하느님의 법이 죄를 파괴한다. 필사 마음이 내주하는 영 조절자와 스스로를 충분하게 정체성을 확인할 수도 있는 것과 똑같이, 만일 죄인이 자기 자신을 온통 죄로 최종적으로 정체성을 확인하면, 신성한 본성의 이 태도는 분명히 바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죄-정체성 확인된 필사자는 본성에서온통 비(非)영적인 상태가 되며 (따라서 개인성으로 비(非)실제적이며) 결국에는, 존재의 소멸을 체험하게 된다. 비(非)실체는, 심지어는 창조체 본성의 미완성조차도, 점진적으로 실제가 되고 점점 더 영적으로 되는 우주 안에서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다.
개인성의 세계와 대면할 때, 하느님은 사랑 넘치는 개인임이 발견된다; 영적 세계와 대면할 때에는, 그는 개인적 사랑이다; 종교적 체험에 있어서는 그는 둘 모두에 해당한다. 사랑은 하느님의 자발적 의지를 정체화한다. 하느님의 선함은 신성한 자유의 지성─사랑하고, 자비를 보이고, 인내를 현시하고, 용서를 베푸는 보편적 성향─의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