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우주관에 있어서 가장 큰 약점은 2중인데: 인도와 중국의 많은 미신들에 의해 오염된 것 그리고 고타마를, 처음에는 깨우친 자로 그 다음에는 영원한 부처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많은 인간 철학을 흡수함으로써 수난을 당해 온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 역시 인간적인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고타마의 가르침들은 지나간 2,500년 동안 계속 진화해 왔다. 깨우친 불교도에게 있어서 부처에 대한 개념이 더 이상 고타마의 인간 개인성이 아닌 것은, 깨우친 그리스도교인 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개념이 호렙 산의 정령(精靈)과 일치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용어의 부족은, 옛날 명칭들에 대한 정서적인 보존과 함께, 흔히 종교 개념에서의 진화에 대한 참된 의의(意義)를 이해하는 데 실패하도록 이끈다.
절대자와 대조되는 하느님 개념이 불교 안에 점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근원은 소승(小乘)불교와 대승(大乘)불교의 추종자들이 나뉘던 초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느님과 절대자에 대한 이원적(二元的) 개념이 마침내 성숙된 것은 불교의 후자 분파이다. 하느님 개념은 세기가 지나가면서 한 걸음씩 진화되어 일본에서 료닌과 호넨 쇼닌 그리고 신란의 가르침으로, 마침내는 그 개념이 아미타 부처에 대한 믿음으로 성숙되게 되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죽음을 체험한 혼은 실존의 궁극인 열반(涅槃)에 들어가기 전에 파라다이스에 머무는 기쁨을 선택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서방의 파라다이스의 하느님인, 아미타의 신성한 자비와 사랑하는 보살핌에 대한 신앙으로써 새로운 구원이 달성된다고 선언한다. 그들의 철학에서, 아미타를 믿는 사람들은 모든 유한 필사자 이해 한계를 뛰어넘는 무한한 실체를 굳게 붙잡고 있다; 그들의 종교 속에서는, 온통 자비로운 아미타,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진실한 신앙과 순수한 심정으로 자기 이름을 부르는 자는 어느 누구에게도 파라다이스의 숭고한 행복 달성에서 실패하는 고통을 주지 않을 그러한 존재에 대한 신앙을 고수한다.
불교의 위대한 강점은 그 신봉자들이 모든 종교로부터 자유롭게 진리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선택의 자유는 유란시아인 신앙으로 특징지어진 것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의 신 교파는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 종교 집단의 하나가 되어 왔다; 그것은 고타마 추종자들의 고대(古代) 선교 정신을 회복시켰고 그리고는 다른 민족들에게 선생들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어떤 근원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근원으로부터 진리를 수용하려는 이러한 기꺼운 마음은 그리스도 이후 20세기의 전반기 동안 종교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난, 정말로 칭찬받을만한 경향이다.
불교 자체는 20세기 부흥기를 지나가고 있다. 그리스도교와 접촉함으로써 불교의 사회적 측면은 크게 증진되어 왔다. 배우고자하는 열망은 형제신분을 이루는 승려 사제들의 가슴속에 다시 불을 붙여 왔으며, 이 신앙 전반에 이루어진 교육으로 인하여 종교적인 진화에 새로운 진보가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다.
이 기록이 쓰인 당시에, 아시아의 대부분은 불교에 희망을 걸고 있다. 과거의 암흑기 기간 동안 그토록 영웅적으로 잘 견디어 온 이 고귀한 신앙이, 인도의 위대한 선생의 제자들이 한때 새로운 진리를 선포하는 그에게 귀를 기울였던 것처럼, 확대된 조화우주적 실체의 진리를 다시 받아들일 것인가? 오래 된 이 신앙이, 자기가 그토록 오랫동안 찾으려고 애써온 하느님과 절대자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 상쾌한 자극에 다시 한 번 반응을 나타낼 것인가?
온 유란시아가, 진화적 기원을 가진 여러 종교와의 접촉으로 19세기 동안 쌓여진 신조와 독단론에 방해받지 않은 메시지, 미가엘의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는 메시지가 선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불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힌두교에게, 아니 신앙을 가진 모든 민중에 이르기까지, 예수에 관한 복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실체, 예수의 복음의 영적 실체가 제시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네바돈의 멜기세덱에 의해 제시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