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시아덱이라는 별자리에서 설명하기에 다소 어려운 또 하나의 문제는, 체포되고 억류되며 재판을 받기 전까지 루시퍼와 사탄 그리고 몰락한 영주들이 해독을 끼치도록 허용되었던 이유들에 관한 것이다.
자녀들을 낳고 키운 부모들은 창조자-아버지인 미가엘이 자기 자신의 아들들을 책망하고 파괴시키는 일을 왜 주저하는지를 더 잘 납득할 것이다. 방탕한 아들에 대한 예수의 이야기는 사랑 넘치는 아버지가 잘못을 저지르는 자녀의 회개를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릴 수 있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악을-행하는 창조체가 그릇된 일을 행하기─죄를 짓기─를 실재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자유-의지성의 사실을 입증하며 만일 연장된 자비가 뉘우침과 회복을 이끌어낸다면 공의(公義) 실행에 있어서 그 어떤 지연도 충분하게 정당화한다.
루시퍼가 추구하였던 대부분의 해방들을 그는 이미 소유하고 있었다; 다른 것들은 그가 앞으로 받게 되어 있었다. 이들 모든 고귀한 자질은 성급함에 길을 내어주고 그리고 자신이 지금 추구하는 것을 소유하려는 그리고 그것을 우주의 우주를 이루고 있는 모든 다른 존재의 권리와 해방을 존중해야 하는 책무를 공개적으로 무시하면서 소유하려는 욕망에 굴복함으로서 잃게 되었다. 윤리적 책무들은 태생적이고, 신성하고 그리고 우주적인 것이다.
최극 통치자들이 루시퍼 반역의 영도자들을 즉각적으로 괴멸하거나 억류시키지 않는 많은 이유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그리고 아마 더 나은 이유들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공의(公義)의 실행을 유예시키는 자비의 특징은 직접적으로 네바돈의 미가엘에 의해 연장되었다. 잘못을 저지르는 자신의 아들들에 대한 이 창조자-아버지의 사랑을 제외하고, 초우주의 최극 공의(公義)가 활동해 왔다. 만일 루시퍼 반란과 같은 그러한 에피소드가 미가엘이 유란시아에서 육신화된 동안 네바돈에서 발생하였다면, 그러한 악의 선동자들은 즉시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절멸(絶滅)되었을 것이다.
최극 공의(公義)는 신성한 자비에 의해 억제되지 않을 때 즉시 활동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자녀들에 대한 자비의 사명활동이 이러한 시간 지연, 씨를 뿌리는 시간과 거두는 시간 사이에 있는 이 구원의 간격을 항상 제공한다. 만약에 뿌려지는 씨가 선하면, 이 간격은 성격의 시험과 개량을 위해 제공된다; 만일 뿌려지는 씨가 악하면, 이 자비로운 연기는 회개와 교정을 위한 시간을 제공한다. 행악자들에 대한 판결과 집행에서의 이 시간 지연은 일곱 초우주들의 자비 사명활동 속에 선천적으로 들어 있다. 자비에 의한 이 공의(公義)의 억제는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것과, 그러한 사랑의 하느님이 우주들을 지배하고 자신의 모든 창조체들에 대한 숙명과 심판을 자비 안에서 통제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시간의 자비로운 연기는 창조자들의 자유로운 의지의 명령에 의해서이다. 죄로 물든 반역들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의 이러한 인내의 기법으로부터 우주 안에 선(善)이 파생된다. 악을 꾀하고 실행하는 자에게는 악으로부터 선이 발생될 수 없음이 너무나 당연한 것과 같이, 하느님을 알고 그의 뜻을 실천하기를 사랑하며 그의 영원한 계획과 신성한 목적에 따라 파라다이스를 향해 상승하는 모든 존재들에게는 만물이(잠재적인 악과 현시된 악을 포함하여) 다 함께 합쳐서 선을 이룬다는 것도 똑같이 참이다.
그러나 이 자비의 지연은 무한한 것이 아니다. 루시퍼 반란을 판결하는 데 있어서의 긴 지연(유란시아에서 계산되는 시간으로)에도 불구하고, 이 계시가 이루어지는 동안, 가브리엘 대 루시퍼의 계류 중인 사건에 대한 첫 번째 청문회가 유버사에서 열렸고, 이 후로는 사탄이 루시퍼와 함께 감옥 세계에 갇힐 것을 지도하는 옛적으로 늘 계신이의 명령이 떨어졌음을 우리는 기록할 수 있다. 이것은 사타니아의 몰락한 세계들 중 어디에 더 방문할 수 있는 사탄의 능력에 종지부를 찍었다. 자비가 지배하는 우주에 있어서의 재판은 속도는 느릴 수 있지만, 분명하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