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들이 생겨나게 됨에 따른 그것들에 대한 자신의 연속적 증여는 그것들이 신(神)의 중앙 개인성 속에 계속 존재하고 머무르고 있을 때의 힘의 잠재 또는 지혜의 저장고를 결코 경감시키지 않는다. 기세와 지혜 그리고 사랑의 잠재에 있어서 아버지는, 파라다이스 아들들에 대한, 그의 종속 창조에 대한, 그리고 그것의 다양한 창조체에 대한 아낌없는 자기증여의 결과로, 그의 소유 중 어떤 것도 줄어들지 않으며 그의 영광스러운 개인성의 어떤 속성도 빼앗기지 않는다.
모든 새로운 우주의 창조는 중력의 새로운 조절을 요구한다; 그러나 비록 창조가 무기한적으로, 영원하게, 그리고 심지어는 무한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결국에는 물질적 창조가 한도 없이 존재하게 된다 하더라도, 파라다이스 섬에 평온히 있는 통제와 조화-협동의 힘은 그러한 무한한 우주에 대한 지배, 통제 그리고 조화-협동에 상응하고 또한 그것에 알맞은 것으로 발견될 것이다. 그리고 한없는 우주에 대한 무제한적 기세와 힘의 이 증여 이후에, 무한자는 여전히 같은 정도의 기세와 에너지로 충전되어 있을 것이다; 분별불가 절대자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은 마치 기세, 에너지 그리고 힘이 우주와 우주마다의 자질을 쏟아 내지 않았던 것과 똑같이, 동일한 무한한 잠재를 여전히 소유하신다.
그리고 지혜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영역들의 사고(思考)에 그토록 자유롭게 배분된다는 사실이 신성한 지혜의 중앙 근원을 조금도 허약하게 만들지 않는다. 우주들이 몇 배가 되고 영역의 존재들이 포용의 한계까지 숫자가 늘어나고, 마음이 이 높고 낮은 지위의 존재들에게 증여되는 일이 중지되지 않고 계속된다 해도, 하느님의 중앙 개인성은 똑같이 영원하고 무한하며 모든-지혜 마음을 여전히 계속하여 포옹할 것이다.
그가 너희 세계 그리고 다른 세계들의 남자와 여자들에게 내주하도록 자신으로부터 영(靈) 메신저들을 보낸다는 사실은, 신성하고 만능이신 영 개인성으로서 기능하는 그의 능력을 조금도 줄이지 않는다; 그가 보낼 수 있고 또 보내게 될 그러한 영 감시자들의 범위와 숫자에는 절대적으로 제한이 없다. 이렇게 그의 창조체들에게 자신을 내어줌은, 신성하게 자질로서 부여받은 이 필사자들을 위한 진보하고 연속하는 실존의 무한한, 거의 믿을 수 없는 미래 가능성을 창조한다. 그리고 사명활동하는 이들 영 실존개체들로서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분배하는 이 일은, 모든-지혜, 모든 것-아심, 그리고 만능이신 아버지의 개인 안에 평온히 있는 진리 그리고 지식의 지혜로움과 완전성을 조금도 경감시키지 않는다.
시간의 필사자들에게는 미래가 있지만, 하느님은 영원 속에 거하신다. 비록 내가 신(神)이 거하는 바로 그곳 근처로부터 흩어져 나왔지만, 나는 여러 신성한 속성들의 무한성에 관하여 납득의 완전성으로 말한다고는 감히 할 수 없다. 마음의 무한만이 실존의 무한과 행동의 영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필사 사람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무한성을 알 길이 없다. 유한 마음은 그러한 절대 진리 또는 사실을 생각해 낼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유한 인간 존재는 그러한 무한 아버지 사랑의 충만하고도 경감되지 않은 영향을 실재적으로 느낄 수─ 글자 그대로 체험할 수─있다. 그러한 사랑은 정말로 체험될 수 있는데, 체험의 본질특성이 무제한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체험의 양은 영적 접수성에 대한 인간 수용능력에 의해 그리고 이에 답하여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는 연관된 수용능력에 의해 엄격히 제한을 받는다.
무한한 본질특성에 대하여 유한한 인식이, 그 창조체의 논리상 제한능력을 훨씬 초월하는 것은 그 필사 사람이 하느님의 상징을 따라 만들어졌다는─그의 속에 무한의 단편이 살고 있는─사실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에게 사람이 가장 가까이 그리고 가장 친밀하게 접근하는 일은 사랑에 의해 그리고 사랑을 통해서인데,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독특한 관계 전체는 조화우주의 사회학에서의, 창조자-창조체 관계─아버지-자녀 애정─에 대한 실재적 체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