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主)는 하늘의 왕국이, 하느님의 아버지신분의 진리와 그에 관계되어진 사람의 형제신분의 사실에 대한 이원적(二元的) 개념으로 시작되고, 그 개념 안에 중심을 이루면서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였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을 오랫동안 속박 받아온 동물적 공포로부터 해방할 것이고, 그와 동시에 다음과 같은 영적 자유를 누리는 새 생명의 자질이 부여되면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것이라고 예수는 선포하였다:
1. 새로운 용기와 증강된 영적 힘을 소유하는 것. 왕국 복음은 사람을 자유에 돌려 놓았고, 그가 감히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2.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가난한 자들에게도 새로운 확신과 참된 위안의 메시지를 전했다.
3. 복음은 그 자체가 도덕적 가치의 새로운 표준이었으며, 인간 행위를 재는 새로운 윤리적 잣대였다. 그것은 인간 사회의 결과적으로 생기는 새로운 질서의 이상을 묘사했다.
4. 그것은 물질적인 것과 비교된 영적인 것의 선재적-탁월성을 가르쳤다; 영적 실체들을 영화롭게 하고 그리고 초인간적 이상들을 드높였다.
5. 이 새로운 복음은 영적 달성을 삶의 참된 목적으로 높이 올렸다. 인간의 일생은 도덕적 가치와 신성한 존엄성의 새로운 자질을 부여받았다.
6. 예수는 영원한 실체란 정의로운 땅에서의 분투의 결과(보상)라고 가르치셨다. 땅에서 사람의 필사자로서의 일시적 거주가, 고귀한 운명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귀결되면서, 새로운 의미들을 획득하였다.
7. 인간의 구원이 하느님의 구원받은 아들들의 끝없는 봉사의 미래 운명 안에서 충족되고 실현되어질, 멀리-미치는 신성한 목적에 대한 계시임을 새로운 복음이 확언하였다.
이들 가르침은 예수가 가르치셨던 왕국에 대한, 확대된 관념을 뒤덮는다. 이 위대한 개념은 세례자 요한의 초보적이면서 혼동된 왕국 가르침들 안에는 거의 포옹되지 않았다.
사도들은 왕국에 대한 주(主)의 말씀들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그 후의 왜곡들은, 신약 성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는 그 때 잠시 동안만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과; 그가 곧 돌아와서 힘과 영광 속에서 왕국을 건설하실 것이라는 그 신앙─그가 육신 속에서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그들이 집착하였던 바로 그러한 관념─에 의해, 복음을 기록한 사람들의 개념이 얼룩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이 세상에 돌아오신다는 관념을 왕국의 설립과 결부시키지 않았다. 예수의 가르침과 “새 시대”가 일치되는 듯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은 채로 여러 세기가 지나갔다.
이 설교 안에 체현된 큰 노력은, 하늘의 왕국에 대한 개념을,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관념에 대한 이상(理想)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였다. 주(主)는 따르는 자들에게 “당신의 왕국이 임하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오랫동안 가르치셨다; 이 때 그는 그들에게 보다 실천적인 동의어인,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대신에 하느님의 왕국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라고 진지하게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지 못하였다.
예수는 왕국, 왕, 그리고 백성들이라는 개념 대신에, 하늘에 있는 가족,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기쁘게 봉사하기에 바쁘며 아버지 하느님께 장엄하면서도 지능적으로 경배 드리기에 바쁜 자유롭게 된 하느님의 아들들의 관념을 몹시 원하였다.
사도들은 이때까지도 왕국에 대하여 중복된 관점을 습득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그것을 여겼다:
1. 개인적 체험이자 그 다음에 참된 신자의 가슴속에서 제시되는 그러한 어떤 사건이라는 관점, 그리고
2. 인종적 혹은 세상적 현상에서의 어떤 문제가 아닐까하는 관점; 기대할만한 어떤 것이 있는 것, 미래에 있는 왕국이라는 관점.
그들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왕국이 다가오는 것을, 마치 반죽 속의 누룩처럼 혹은 겨자씨가 자라나는 것같은, 그러한 단계적인 발달로 보고 기대하였다. 왕국이 다가오는 것은 인종적 감각이나 혹은 세계적 감각으로 갑작스럽고도 동시에 극적인 장관일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예수는 하늘의 왕국이 보다 높은 영적 삶의 본질특성을 실현하는. 그들의 개인적 체험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 주면서 결코 지친 적이 없었다; 영적으로 체험하는 이 실체들은 신성한 확실성과 영원한 장엄의 새롭고도 보다 높은 차원들로, 진보적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 주면서 결코 지친 적이 없었다.
이 날 오후에 주(主)는 왕국의 이중적인 본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현상을 묘사하심으로써 명백하게 가르치셨다:
“첫째, 이 세상에서의 하느님의 왕국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숭고한 욕구, 사람이 진보된 윤리적 도덕적 행위성의 좋은 열매를 맺는 사심-없는 사랑이다.
“둘째, 하늘에서의 하느님의 왕국은, 믿는 필사자들의 목표인데,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완전하게 된 곳이며, 하느님의 뜻이 더욱 거룩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수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 왕국에 지금 들어간다고 가르치셨다. 다양한 강연에서 그는 그 왕국에 신앙으로 들어가기 위한 두 가지 기본 조건을 다음으로 가르치셨다:
1. 신앙, 성실성. 어린아이처럼 올 것, 아들관계의 증여를 하나의 선물로 받아들일 것; 의심 없이, 그리고 아버지의 지혜에 대한 참된 신뢰와 충만한 자신감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로 복종할 것; 편견과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서 그 왕국에 들어올 것;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열려 있고,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
2. 진리를 갈망함. 의를 향하여 목이 마름, 마음을 바꿈,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그리고 하느님을 발견하고자 하는 동기를 획득함.
예수는 죄가 어떤 결함이 있는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종하지 못하는 의지에 지배된 어떤 알고있는 마음의 소산이라고 가르치셨다. 죄에 관하여, 예수는 하느님께서 용서해 왔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러한 용서함은 우리 이웃을 우리 동료들을 용서하고 있는 행동에 의하여 개인적으로 소용 있도록 만든다는 것을 가르쳤다. 너희가 육신 안에서 너희 형제를 용서할 때 그로서 너희는, 너희 자신이 저지른 나쁜 짓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함의 그 실체를 받아들이기 위한 수용능력을 너희 자신의 혼속에 창조한다.
사도 요한이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들에 관한 이야기를 쓸 무렵에, 초기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박해의 근원이었던 하느님-왕국에 대한 관념에 너무 어려움을 겪었으므로 그 말을 거의 버릴 지경이 되었었다. 사도 요한은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많이 이야기한다. 예수는 그것을 “생명의 왕국”라고 자주 표현하였다. 또한 “너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왕국”에 대하여서도 자주 언급하였다. 그러한 체험을 “아버지 하느님과의 가족적인 친교”라고 표현한 적도 있었다. 예수는 왕국이라는 말 대신에 다른 많은 단어를 사용하려 하였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무엇보다도 그가 사용한 것은; 하느님의 가족, 아버지의 뜻, 하느님의 친구들, 믿는 자들의 형제관계, 사람의 형제신분, 아버지의 양 떼, 하느님의 자녀들, 충실한 자의 동료관계, 아버지의 봉사, 그리고 자유롭게 된 하느님의 아들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왕국 관념의 사용을 피할 수가 없었다. 50년이 넘게 지난 후에, 로마 군대에 의해 비로소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나서, 왕국에 대한 이 개념은, 사회적 그리고 제도적인 측면들이 급속도로 확장되고 그리고 결정화 되어가던 그리스도교 교회에 의해 점령되면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예배종파로 바뀌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