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날인 이 안식일에 예수와 12사도들 그리고 신도들의 집단이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정원에서 불 옆에 모여 있었을 때, 나다니엘이 예수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주(主)여, 우리에게 남들이 해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우리가 남들에게도 행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시고 일생의 옛 원칙들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우리가 어떻게 항상 그러한 가르침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죄 가운데에 기꺼이 어울리고자 찾아다니는 사악한 호색한(好色漢)의 경우를 예로 들어, 제 뜻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사악을-의도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하라고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예수는 나다니엘의 질문을 들으시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서서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씀하였다: “나다니엘아, 나다니엘아! 너는 가슴 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너는 영(靈)으로 난 자로서 내 가르침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너는 지혜와 영적 납득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 진리를 듣지 못하느냐? 다른 사람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대하라고 내가 너희에게 가르쳤을 때, 내가 높은 이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지, 나의 가르침을 악한-행위의 용기를 고무하는 허가증으로 왜곡하도록 유혹당할 자들에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주(主)께서 말을 마치시자, 나다니엘이 일어나서 말하였다: “그러나 주(主)여, 제가 선생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해석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단지 그러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선생님의 가르침을 잘못 판단한다는 가정 아래에서 이 질문을 했습니다. 이 문제들에 관한 설명을 좀 더 우리에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나서 나다니엘이 자리에 앉자, 예수가 말씀을 계속하였다: “나다니엘아, 나는 네가 마음속에서 그런 악한 관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언어로 그리고 사람들이 이야기해야 하듯이 가르칠 수밖에 없는 나의 일상의 가르침에 대해, 네가 그렇게 자주 진정으로 하는 영적 해석에 실패하는 것에 실망이 가는구나. 이제 내가 너희에게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대하라.’는 이 가르침, 삶의 원칙에 대한 해석에 부가되어있는 여러 다른 차원의 의미들에 관해 가르쳐주도록 하겠다:
“1. 육신의 차원. 그러한 순전히 이기적이고 호색적인 해석은 너의 질문에서의 가정에 의해 잘 예증될 것이다.
“2. 감정의 차원. 이 차원은 육신의 차원보다는 한 차원 높은 것이며, 동정심과 연민이 이러한 삶의 원칙에 대한 각자의 해석을 강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마음의 차원. 마음의 이성(理性)과 체험의 지능이 이제 행동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삶의 원칙이 그렇게, 심오한 자아-존중의 고결성으로 체현된 최고의 이상주의에 조화되는 것으로 해석되도록, 훌륭한 판단이 명령한다.
“4. 형제같은 사랑의 차원. 자신의 형제들의 안녕에 사심-없는 헌신을 하는 좀 더 높은 경지의 차원이 발견된다. 하느님의 아버지신분을 의식하고, 그 결과로 사람의 형제신분을 인식함으로서 성장하여 나오는, 전심을 다하는 사회적 봉사의 이러한 더욱 높은 경지에서, 일생의 이 기본적 원칙의 새롭고 훨씬 더 아름다운 해석이 발견된다.
“5. 도덕적 차원. 그런 다음에 너희가 해석에서의 참된 철학적 차원을 달성할 때, 사물의 옳고 그릇됨에 대하여 실제 통찰력을 가질 때, 인간 관계의 영원한 어울림을 감지할 때, 어떤 고결하고, 이상적이고, 현명하고 그리고 편견 없는 제 삼자가 너희 일생 상황에 대한 조절에서의 너희 개인적 문제에 적용되는 것으로. 명령을 그렇게 바라보고 해석하리라 너희가 상상하는 대로, 너희는 해석의 문제를 그렇게 바라보기 시작할 것이다.
“6. 영적 차원. 그리고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어떻게 대하리라고 생각하는 그대로 모든 사람을 대하라는 신성한 명령을, 이 일생의 원칙에서 인식할 것을 우리에게 재촉하는, 그러한 영적 통찰력과 영적 해석의 차원을 우리가 달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 관계에 대한 우주의 이상(理想)이다. 그리고 이것이, 너희의 최극 욕망이 언제까지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일 때에, 모든 그러한 문제를 대하는 너희의 자세이다. 그러므로 비슷한 정황에서 내가 그들에게 행하리라고 너희가 알고 있는 그것을, 너희가 모든 사람에게 행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때처럼 예수가 사도들을 놀라게 한 적은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예수가 물러가신 이후에도 한동안 주(主)의 말을 놓고 토론을 계속하였다. 나다니엘은 자신의 질문에서의 영을 예수가 오해하였다는 자신의 추측으로부터 회복하기까지 더디었지만, 다른 자들은 자신들의 철학적인 동료 사도가 생각을-촉발시키는 그러한 질문을 던질 용기를 가졌었다는 것에 고마워하는 정도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