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 역시 파라다이스의 증여이지만, 같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직 간접적으로 그러하다. 시간은 동작으로 인하여 발생되며 마음은 순차성을 선천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실천적인 관점에서 보면, 움직임은 시간에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파라다이스-하보나 표준일이 독단적으로 그렇게 인식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움직임에 기초를 둔 우주 시간 단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 호흡의 전체성은 시간 근원으로서의 그것의 지역적 가치를 파괴한다.
공간은 그것이 파라다이스로부터 기원을 두고는 있지만, 무한하지 않다; 절대적이지도 않다, 이는 그것이 분별불가 절대자에 의해 충만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간의 절대적인 한계를 알지 있지 못하지만, 시간의 절대가 영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시간과 공간은 시간-공간 창조계, 일곱 초우주들 안에서만 분리될 수 없다. 비(非)시간적 공간(시간이 없는 공간)이 이론적으로 존재하지만, 진정으로 비(非)시간적 장소는 오직 파라다이스 지역뿐이다. 비(非)공간적 시간(공간이 없는 시간)은 기능에서의 파라다이스 차원의 마음 안에 존재한다.
파라다이스와 맞닿아 있고 충만 공간과 비충만 공간을 구분시키는 비교적 움직임이 없는 중앙-공간 지대들은 시간으로부터 영원으로 향한 변환 지대들인데, 그래서 파라다이스 순례자들이 이 변환 동안 무의식이 되는 필요성이 생기며, 이때의 이 변환은 파라다이스 시민권으로 정점을 이를 때까지 이른다. 시간-의식 방문자들은 그러한 잠을 자지 않고 파라다이스로 갈 수 있지만, 그들은 시간의 창조체로 남아 있다.
시간에 대한 관계들은 공간에서 움직임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시간에 대한 인식은 존재할 수 있다. 순차성은 움직임이 없는 가운데에도 시간을 인식할 수 있다. 마음의 선천적인 본성 때문에 사람의 마음은 공간-얽매임보다 덜 시간-얽매임 이다. 심지어는 육신으로서 이 땅의 생애 동안에도, 사람의 마음이 엄밀하게 공간-얽매임에도 불구하고, 창조적인 인간 상상력은 비교적 시간과 무관하다. 그러나 시간 자체는 유전적으로 마음의 본질특성은 아니다.
다른 세 차원의 시간 인식이 있다:
1. 마음으로 인식된 시간─순차, 동작에 대한 인식 그리고 기간에 대한 감각.
2. 영으로 인식된 시간─하느님을 향한 움직임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점증하는 신성의 차원들을 향한 움직임에 대한 인식.
3. 개인성은 실체에 대한 통찰력으로부터 독특한 시간 감각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서 현존에 대한 인식과 기간에 대한 자각을 창조한다.
비(非)영적 동물들은 오직 과거를 알며 그리고 현재에서 산다. 영-내주 사람은 선견(통찰력)의 힘들을 가진다;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 오직 앞을 내다보고 진보적인 태도들만이 개인적으로 실제적이다. 정적인 윤리와 전통적인 도덕성은 단지 약간 초(超)동물적이다. 금욕주의도 자아-실현의 높은 계층은 아니다. 윤리와 도덕은 그것들이 역동적이고 진보적일 때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 되며 우주 실체와 함께 살아있게 된다.
인간의 개인성은 단순히 시간-과-공간 사건들의 부수물이 아니며; 인간의 개인성은 그러한 사건들의 조화우주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