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과학과 철학이 그들의 이성과 논리에 의해 하느님의 존재 가능성을 가정할 수 있다 할지라도, 오직 개인적인 종교 체험만이 영의 인도를 받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러한 최극 그리고 개인적 신(神)에 대한 확실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하느님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가정은 살아있는 진리에 대한 그러한 구체적 실현 기법에 의해서 하나의 종교적 실체가 된다.
하느님의 확실성 체험에 관한 혼동은 분리된 개별존재들과 서로 다른 인간 종족들에 의해 얻어진 그 체험에 대한 상이한 해석과 그 관계들로부터 발생된다.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할 수 있지만, 하느님에 관하여 강연하는 것은 지적이고 철학적이기는 하나 여러 가지로 나뉘고 때로는 혼란스럽게 잘못되기도 한다.
선하고 고귀한 남자가 자기 아내를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할 수도 있지만, 결혼에 이른 사랑의 심리학에 관한 필기시험에서 만족스럽게 통과하기가 도저히 불가능하다. 또 어떤 남자는, 자기 배우자에게 거의 또는 전혀 사랑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시험에서 가장 만족스럽게 통과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의 참된 자연본성을 살피는 통찰력에서의 불완전성은 그의 사랑의 실체나 혹은 진실성을 조금도 무효화시키지 않는다.
만약에 너희가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신앙으로 그를 알고 그를 사랑한다면─그러한 체험의 실체가, 과학의 의심하는 암시, 논리의 트집 잡기, 철학의 가설, 아니면 하느님 없는 종교를 창조하려는, 좋은-의미를 지닌 혼들의 영리한 제안들 때문에, 그 어떤 면에서도 줄어들거나 손상되는 것을 허용하지 말라.
하느님을 아는 종교인들의 확신은 의심하는 물질주의자의 불확신에 의해 교란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믿지 않는 자의 불확신이 체험적 신자의 견고한 신앙과 흔들릴 수 없는 확신에 의해 강한 도전을 받아야만 한다.
과학에게나 종교에게나 가장 강력한 공헌을 하려면 철학은 물질주의와 범신주의라는 두 극단을 피해야만 한다. 개인성의 실체─변화의 현존 안에서의 영구성─를 깨닫는 철학만이 사람에게 도덕적 가치가 될 수 있고, 물질적 과학과 영적 종교의 이론들 사이의 연락매개자로 봉사할 수 있다. 계시는 진화하는 철학의 허약함을 위한 보완이다.